표절인가 창조적 이식인가? 한국 최초 동화구연 가이드북에 숨겨진 100년 전의 '비밀'
1920년대 조선, 라디오의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숨을 죽였다. 지금의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이야기꾼'들의 시대, 그 중심에는 소파 방정환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라디오 스타' 연성흠이 있었다. 1927년 경성방송국(JODK) 개국과 함께 '어린이 시간'의 마이크를 잡았던 그는 당대 최고의 구연가였다.
그런 그가 1929년, 조선 최초의 본격 동화구연 이론서인 『동화구연법 그 이론과 실제』를 발표했을 때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이 기념비적인 저술의 이면에는 100년 가까이 숨겨져 온 놀라운 반전이 존재한다.
1. 완벽한 은폐: 일본 이론의 은밀한 '번역'
연성흠의 저서는 오랫동안 그의 독창적인 연구물로 여겨졌으나, 실상은 일본 동화구연의 선구자 키시베 후쿠오(岸邊福雄)가 1909년에 펴낸 『동화하는 법의 이론과 실제(伽羅話の仕方 理論と實際)』를 발췌번역(본문의 일부를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었다.
연성흠은 이 책이 번역본임을 전혀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작의 구조를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의 창작물처럼 보이게 했다. 원작자인 키시베가 본문 뒤에 짧게 덧붙였던 '요언(要言, 중요한 말)'들을 연성흠은 독립된 항목으로 분리하여 배치했다. 이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 원전의 흔적을 지우고 체계적인 이론가로서의 권위를 세우려 했던 의도적인 '구조적 조작'으로 풀이된다.
2. 로컬라이징의 치열한 사투: '모모타로'가 '흥부'가 되기까지
그럼에도 이 책을 단순한 '표절'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처절한 '로컬라이징(현지화)'의 흔적 때문이다. 연성흠은 조선 아이들에게 일본의 색채를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주체적 판단 아래, 텍스트 전반에 걸쳐 '굴절(번역과 변형)'을 시도했다.
- 작품의 교체: 일본의 상징적인 전래동화 '모모타로'나 '하나사카지지'를 삭제하고, 그 자리에 조선의 '해와 달', '흥부와 놀부'를 채워 넣었다.
- 명칭의 조선화: 일본의 귀도(鬼島, 오니가섬)를 '가귀성(餓鬼城, 귀신 성)'으로, 일본식 의복인 화복(和服)을 '평복(平服)'으로 바꾸었다.
- 인물의 변용: 일본식 이름인 '우메키치'는 '복동'으로, '차메'는 '복길'로 개칭하여 조선의 아이들이 이질감 없이 이야기에 몰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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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창조적 간극': 번역할 수 없었던 몸짓들
연성흠의 저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구연 시 필요한 14가지 표정과 몸짓(실망, 공포, 경악, 탄원, 사색, 결단, 감사, 분노, 억제, 조소, 희열, 해학, 감탄, 슬픔)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론의 치밀함을 위해 원작의 세밀한 묘사를 가져왔다.
"슬픔(悲哀)을 표현할 때: 목소리는 낮고 가늘게(얏게), 느리고 무겁게 한다. 얼굴은 약간 숙이고 눈을 스르르 감으며 입은 가만히 다문다. 상체를 조금 굽히고, 왼손은 편 채로 왼쪽 뺨이나 콧울 근처에 갖다 댄다."
하지만 여기서 '창조적 간극'이 발생한다. 연성흠은 원작의 핵심인 '실전 가이드' 부분(제17절)을 통째로 생략했다. 이는 일본 전래동화의 특정 대목에 맞춰 설계된 키시베의 복잡한 몸짓 이론이 자신이 바꾼 조선의 동화(흥부와 놀부 등)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로컬라이징했지만 그에 걸맞은 '조선식 몸짓 이론'까지는 미처 정립하지 못했던 번역자의 한계이자 고민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4. '제3의 향방': 이식과 창조 사이의 정당한 평가
비평가 임화(林和)는 외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제3의 향방'이라 일컬었다. 연성흠의 작업 역시 이 관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1920년대 후반 조선은 동화구연의 열풍에 비해 이를 뒷받침할 이론적 토양은 불모지에 가까웠다. 연성흠은 일본의 선진적인 이론을 '굴절'시켜 들여옴으로써, 조선의 구연가들에게 최소한의 지침을 제공하고자 했다. 비록 완벽한 창작은 아니었을지라도, 척박한 땅에 외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이식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한국 아동문학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결론: 100년 전의 '창조적 번역'이 우리에게 묻는 것
연성흠의 『동화구연법 그 이론과 실제』는 표절이라는 도덕적 흠결과 로컬라이징이라는 주체적 노력이 공존하는 독특한 텍스트이다. 그는 체계적인 이론이 부재했던 시절, 타자의 이론을 빌려와 우리 식의 구연 문화를 정립하려 했던 과도기적 선구자였다.
이러한 '이식과 창조'의 역사는 오늘날 K-콘텐츠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대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외부의 것을 받아들여 우리만의 것으로 바꾸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창조적 행위는 아닐까?
출처 : 류덕제. (2021). 연성흠의 동화구연론과 의미. 국어교육연구, 77, 257-287.